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시마 유키오 (문단 편집) === 작가로 등단 이후 === 그 후에도 미시마는 계속 문학 활동과 공무원 생활을 병행하며 몸이 약해졌는데, 하루는 출근길에 기차역에서 과로로 쓰러져 플랫폼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했고[* 다행히 기차가 올 시간보다 한참 전에 쓰러진 거라 기차에 치일 일은 없었고, 역무원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잡아주면서 기어 올라와서 살았다고 한다. 이후 병원에 옮겨져 입원을 했었다.], 이 일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 입원한 미시마 유키오의 손을 붙잡고 "소설이 너한테 대체 뭐길래 그러냐"며 울었다고 한다. 엘리트집안에서 무난히 기대한 대로 엘리트로 성장한 아들한테 엘리트 공무원으로 가족의 위상을 다시 살릴 거라는 기대가 워낙 컸던 집안이기에 충격이 더 컸었다. ]는 미시마가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열 달 만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가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이후 과거 그의 작품활동을 지원한 기무라 토쿠조의 말대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일류작가 겸 최고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는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 소설과 극본 외에도 방송이나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고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 한국 드라마 중 [[괜찮아, 사랑이야]]나 [[시카고 타자기(드라마)|시카고 타자기]] 같은 작품을 보면 유명한 젊은 작가가 거의 연예인 스타처럼 나오기에, 한국에는 그런 스타일의 작가가 없는데[* 일단 문학성과 대중성이 둘다 압도적인 젊은 문학가가 전혀 없고, 그걸 이루는 문학가들은 거의 중년 이후에나 유명해지고 나서야 비문학적인 사회활동을 병행한다. 그나마 [[공지영]] 정도가 30대 초반부터 대중성을 크게 잡았고 문학성도 인정은 받았으나, 작품마다 히트를 치지는 못했고 문학성에서도 온전히 최고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한국에서는 저 드라마 주인공 스타일에 제일 가깝다--] 그렇게 표현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당시 미시마 유키오는 고작 20대부터 정말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쓰는 작품마다 히트시키고 여러 문학상 수상으로 문학성의 인정까지 모두 받으며, 온 언론과 방송의 주목으로 진짜 연예인 스타 같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당시가 TV라는게 나온지 얼마 안 되어 TV용 연예인(영화 배우나 무대용 연예인들의 부업 같은 느낌)이라는 직업 장르가 정확히 잡히지 않아, 연예인이 아닌 다른 분야 유명인들이 TV로 더 인지도를 치고나갈 여지가 현대보다 훨씬 크게 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건 정말 어렵다는 대중성과 문학성 둘다 확실히 거머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대중적 스타작가의 계보를 잇는 아이콘.[* 본래 19세기 대중소설의 개념이 등장하는 시대에 등장한 여러 대중소설작가들은 낭독회를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한국도 1980년대까지는 유명한 소설가는 연예인급 인기를 모았다. 일제시대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 [[최인호(작가)|최인호]]의 인기는 어마어마 해서 거의 아이돌에 가까웠다. [[이문열]] 역시 1980년대 연예인급 소설가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 노벨상 후보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미시마 사후에야 공개된 사실이다. 노벨 재단은 당대에는 수상 후보자를 공개하지 않으므로 당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인물로 세간에서 거론될 만큼 인정받는 작가였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다.] 미시마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1960년대에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작 본인은 1970년 자살한 탓에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언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천황]]주의자여서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에도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마구 질타 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우익 정치세력에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 좌파성향 학생들이 그들과 대립했음에도 그에게 관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의 젊은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도 어울렸고, 자위대에 체험입대하여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04]] 전투기를 타는 따위 기행을 벌였다. [[한국]]에도 수차례 비공식적으로 와서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 등을 탐방했고,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엔 [[예비군]]의 [[공비]] 수색 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한 경위로 나중에는 그와 뜻을 같이 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다테노카이]]'''(楯の會, 방패회). [[천황]]의 방패란 의미다. 참고로 이웃나라 한국의 [[5.16 군사정변]]을 모델로 한 정변을 계획한 적도 있지만 무산되었다.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603310896_01.jpg]]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들과 만나 청중 1천여 명 앞에서 2시간 반가량 대담을 진행했다. 전공투 학생 수백 명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로,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이었다. 그는 "[[천황]]만 인정하면 너희와 함께 가겠다."라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넓은 배포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공투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가 있나. 그는 전공투가 지향했던 사회주의의 계급 타파에 대해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말하며 천황제 인정을 양보로서 제안했다.[* 사실 이게 정말로 천황제 중심의 군주국가를 지지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미시마는 보수우익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종의 극우 혁명가였는데, 전공투들의 '경제적 목적'을 인정할테니 다른 부분과 손잡자는건 좌-우익의 혼합사상, 즉 [[제3의 위치]]이다. 나치즘과는 상관없는 대중주의 파시즘, 혹은 [[민족 볼셰비즘]]인 셈이다. [[기타 잇키]]가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세우는 대신, 천황의 말과 행동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인사들이 통제하게 해 대중들의 뜻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게 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설전에서 전공투 학생들은 미시마에게 '그건 궤변이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당시 전공투들과 벌인 대담은 일본의 [[극좌]] vs [[극우]]를 비교하는 자료로 등장할 때가 잦다. 특이한 건 서로가 일본의 현체제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인다는 것.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했고, 패널로 참가했던 전공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본인 구미에 맞는 만족감을 얻고 간 모양이다. 이 대담은 이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TBS 요약본: [[https://youtu.be/toNIKW1AB0w|#1]], [[https://youtu.be/2kIbIEZHeUQ|#2]], [[https://youtu.be/A_iDJ1asK6E|#3]], [[https://youtu.be/vBIbOHslUI4|#4]], [[https://youtu.be/Ynt2dWQytZg|#5]]) 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 1969-2000>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전학공투회의|전공투]]의 [[전학공투회의#s-5|해당 문단]]을 참고할 것. 이런 인간이면서도, [[미필|군대는 안 갔다.]] [[제2차 세계 대전|2차대전]] 때 징병 소집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젊은 [[군의관]]이 청진을 할 때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결핵]]으로 오진하고 군 입대에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오진인 줄 알고서도 끝까지 그 결과대로 묵인했다는 것이다.[* 미시마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에 따르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을 때는 아쉬웠으나 신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병역비리]]와 [[치킨 호크]]의 대표적인 예이다. ~~역시 집안 빽이~~[[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0520111922&Section=|#]]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